한강의 밤섬은 한자어로 율도(栗島)입니다. 섬의 모양새가 마치 밤알을 까놓은 것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한편으론 가산(駕山)이라고 불리었으며 여의도의 별칭인 나의주(羅衣州)에 상응하여 율주(栗州)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밤섬의 동부와 서부에 발달된 하식애(河蝕崖;하천의 침식작용 등으로 인하여 생긴 절벽)는 소해금강이라고 불렸으며, 큰 밤섬 아래에는 한강의 퇴적으로 인한 9개의 작은 하중도(河中島)가 이어지며 수십 리의 백사장이 만들어져 「서울명소고적」에서 ‘율도는 일찍이 서호팔경의 하나인 율도명사(栗島明沙)라 하였듯이 맑은 모래가 연달아 있어서 그야말로 한강 강색과 섬의 풍치는 묘하게 어울린다.’라고 했을 만큼 주변 경관이 절경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한편, 밤섬에 인접한 여의도가 점점 넓은 하
중도로 발달함에 따라 홍수 때를 제외하고는 여의도와의 사이 백사장을 건너 인천 등으로 이어지는 길이 되었습니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한강의 밤섬은 고려 때까지는 귀양 보내던 섬이었다고 하며, 1394년 조선시대 한양천도 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주로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처음 정착하였으며 밤섬의 백사장과 한강수운을 활용해 6‧25 전쟁 이전까지 조선업과 뱃사공, 물산의 도선 하역 등이 널리 성행하였습니다. 한편 「용재총화」 문헌에 의하면 세종·성종시대에는 뽕나무를 많이 심어서 ‘나라의 뽕밭’이라 불릴 만큼 누에치기도 성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밖에도 약초(감초)를 심고 염소를 방목하기도 하였으며 밤섬이 폭파되기 전인 1967년까지 주로 조선, 도선업, 어업과 땅콩, 채소농사 등을 생업으로 하였습니다.
조선 제 13대 임금인 명종의 「명종실록」 11년(1556년) 4월 기록에 따른 밤섬주민의 생활상을 보면 외부로의 왕래가 뜸해 남의 이목을 덜 의식한 듯 섬주민의 생활방식이 대체로 자유분방하여 남녀가 서로 업고 업히고 정답게 강을 건너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으며, 동성동본이고 반상이고 따지지 않고 어울리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밤섬은 마 씨, 인 씨, 석 씨, 선 씨 등 희귀성을 가진 대가족 집단거주지였던 특징이 있습니다. 그밖에도 은행나무 고목(당산목)과 부군당을 모시며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섬은 1968년 2월 10일 여의도개발의 일환으로 폭파되었습니다. 밤섬을 없앰으로써 한강의 물흐름을 살리고, 폭파 부산물인 잡석은 여의도 제방 쌓는데 이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폭파되기 전 밤섬에 거주하던 62가구 443명의 원주민은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산 중턱으로 집단 이주하였습니다. 하지만 폭파되었던 수면 아래의 밤섬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유속에 의하여 다시 퇴적물이 쌓이고 나무와 풀이 우거져 동식물들이 찾아들고 억새, 갯버들 등 친수 식물이 자생하면서 1990년대에 들어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도심 속의 ‘철새도래지’로 부각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에 따라 서울시는 1999년 8월 10일 밤섬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한 이후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또한, 2012년 6월 26일에는 우리나라의 도시 내부 습지로는 드물게 18번째로 람사르습지에 등록되었습니다.